NekoNeko\’s blog

11월 17, 2010

Filed under: 시사 — NekoNeko @ 5:48 am

RareBird님의 글을 트랙백합니다.

같은 사실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받아 들이는 방법이 다를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RareBird님의 글을 보면서 저는 노무현 정부의 높은 이상은 현실적인 근거 없이 허황되었었고 노무현 정부의 현실적인 인식은 오야붕 꼬붕식의 패거리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수능 등급 조정부터 봅시다. 인용합니다.

“대통령 직속의 교육혁신위원회를 통해서, 학생들의 교육내용 전반을 기록한 교육이력철과 수능등급제 도입으로 입시 문제를 개혁하려 했다. 저 는 학생들을 20%씩 나누는 5등급제를 주장했다. 하지만 교육부가 ‘그렇게 하면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반대하면서, 9등급제로 하고 1등급 비율은 4%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리 공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얼굴이 붉어질 정도의 격론이 벌어졌고, 회의 참석자 가운데 사표를 써 들고 와 반대하는 분도 있었다. 결국 대통령이 교육 관료의 손을 들어줬다.”
좀더 진보적이고 강력한 조처를 내놨어야 하는 거 아닌가?

사표를 써 들고와서 반대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면 기본적으로 제안하고 있는 정책에 현실적인 문제가 많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정우 교수는 일차적으로 반대하는 교육부 관료들을 설득해야 했지 않나요? 20%의 5등급 내신이 좋을까요 아니면 4%의 9등급 내신이 좋을까요? 이것은 토론이 될 수 있는 주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수능 등급의 효과를 평가해 볼까요?

“기 업에서 학벌 위주로 뽑는데다, 패자부활전이 없다. 대학 졸업 때 좋은 직장 못 가면 평생 못 간다. 그게 학교의 입시 위주 공부 환경을 만들고, 근시안적 인간을 만든다. 일류대학의 이기주의도 학생들을 고통으로 몰고 있다. 그들은 한국의 교육 문제나 학생들의 건강과 장래에 대해 관심이 없다. 똑똑하고 돈 많은 집 학생들을 뽑겠다는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 정부는 이런 문제를 방조하고 조장한다. 대학, 기업, 정부 3자의 공동 작품이 한국의 입시지옥이다.”

여기서 이정우 교수는 한국 교육의 문제를 학벌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학벌을 철폐하려면 평등주의적 조치가 필요하고, 수능 등급을 5등급으로 나누면 일류 대학이 성적 좋은 학생들만 가려 뽑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학벌의 서열 구조가 흐트러지게 되겠지요.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육부의 반론을 봅시다. 간단합니다. “그렇게 하면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즉, 이 정책제안이 초래할 전체적인 학력 수준의 하락이라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 — 좀 더 강하게 말하면 학교를 공부 안하는 곳으로 만들 것이냐? 라는 문제 — 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죠.  학벌과 입시의 문제는 한국 사회의 전체적인 학력 수준의 하락에 비하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여기에 이정우 교수나 노무현 정부 인사들은 어떤 반론을 제기했나요? 인터뷰 기사에서는 그 부분은 생략되고 노무현 대통령의 결정만 마치 핑계모냥 언급이 되고 있네요. 그렇다면 결국 수능 5등급 정책제안은 교육부의 기초적인 학력저하 문제 반론조차 감당하지 못한 현실성 떨어지는 이상론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제가 보기에 노무현 대통령이 이 문제에서 교육관료들의 손을 들어준 것은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성 떨어지는 제안을 대통령이 잘 걸러냈으니까요. 그런데 그 다음 글을 읽어보니 이 노무현 대통령의 현실 인식조차도 이 정도 수준밖에 안됩니다…

“노사 문제와 교육은 실패했다. 둘 다 대통령이 별로 의지가 없었다. 대통령이 ‘내가 노조를 평생 도와줬는데, 나를 이렇게 흔들 수 있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네이스 등을 두고 정부를 흔드는 전교조에 대한 불신도 생겼다. 대통령도 협량했고, 노조도 전략이 부재했다.”

노조, 전교조는 이익집단입니다. 이들은 그 집단의 이익에 따라 내 편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또, 노조가 과거 노무현 변호사와 같은 편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 권력을 가진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그 권력을 그들의 이익을 위해 써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상식일텐데 노무현 대통령은 여기서 이들을 마치 배신자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집단의 이익추구라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 역시 노대통령에게는 자신의 정치적 세력 형성이라는 목표와 비교했을 때 하위개념밖에 되지 못한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정책 입안을 세력싸움으로 보던 사람들은 이런 무시무시한(!) 파쇼적 관점을 갖게 됩니다.

내부 동력이 없었나?

“인력의 구성이 충분치 못했다. 교육의 경우 준비된 진보적인 인사가 위원회와 부처, 장관직까지 가릴 것 없이 한꺼번에 대거 들어가줘야 한다. 한두명으로는 고립되고 실패한다. 참여정부가 주는 교훈이다.”

그러니까 뒤집어 말하면 반대파는 모조리 숙청해야 한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반대파가 누구입니까? 수구 꼴통들도 아니고, 소 귀에 경 읽기 식 입법부 국회의원들도 아니고 행정부 “관료”들입니다. 관료들이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경우가 많지만 관료들이라는 사람들은 정책적 논리가 통하는 사람들입니다. 관료들은 또 상대적으로 정치적인 입장에서 자유로운 것이 소위 “영혼이 없다”는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국민의 정부 기조를 따라가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노무현 정부의 기조, 이명박 정부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기조를 따라가는게 이들 관료들의 생존 전략이고 또 공무원의 정치 중립 의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관료들이 정치색이 옅은 것이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한 일일 텝니다.  이런 관료들을 내 편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문제점은 자성하지 않고 이들 관료들을 마치 말 안통하는 수구꼴통 반동세력으로 취급할 것인가요?

또, 노무현 대통령 역시 인사권이라는 막강한 권한이 있었습니다. 임기 초반 여소야대의 한나라당 견제가 막무가내였지만 이것 역시 탄핵 열풍 이후로 입법부 역시 여당이 장악하지 않았었습니까? 그런데도 인력의 구성이 충분하지 못했다구요? 결국 반대파를 다 쫓아내어야 했다는 얘기를 이정우 교수는 하고 있는데 독재를 하지 않고서는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소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정 필요하다면 예전 독일처럼 파시즘으로 가서 국민이 독재자를 선출하도록 하는 수 밖에 없어요.

전체적으로 이정우 교수의 이 회고에는 여전히 이분법적인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진보적 정책 입안은 세력 싸움인데 반대편에 위치한 이 수구꼴통 세력들은 전향시킬 방법이 없다… 고 암묵적인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 민주주의를 운운하는 사람들의 기본 자세가 아닙니다. 애초부터 토론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특히나 이정우 교수처럼 경제학을 전공하셨다는 분이 이런 사고에 젖어 있는 것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공산주의 경제학이든 자본주의 경제학이든 사회적인 비용을 줄인다는 가치 기준은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 얘기는, 경제학적인 사고가 중요한 정책의 입안에서는 분배주의자와 성장주의자 역시 의견교환이 가능하며 또 그것이 사회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의 강점이자 미덕일텝니다. 이러한 경제학적인 정책 입안의 프로세스가 참여정부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 그것이 비록 실패로 끝났더라도 — 예시하지 않은 채 세력논리로 회귀하는 것은 경제학을 전공하신 학자가 취할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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