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김순덕 칼럼에서 인용. 한미 FTA 추진과정에서의 "진짜" 문제점을 제대로 짚어주고 있다. 걸걸한 김순덕씨의 입담 역시 양념격 볼거리.
한미 FTA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FTA 체결이나 FTA 체결 이후 득실 계산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한국이 한미 FTA 체결 이후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려 있다. 결국 국가들이 국제무역을 해 나가는 이유는 리카르도의 비교우위론 이외에는 합당한 설명이 없는 셈인데 리카르도의 비교 우위에 따르면 국제 무역의 결과는 요즘 유행어대로 "양극화의 심화"이다. 즉, A국 B국 국제 무역이 도입되기 전에는 모두 포도주와 면사를 생산했으나 국제 무역이 도입되고 난 이후에는 A국은 포도주 생산에 특화하고, B국은 면사 생산에 특화해야 양국 모두가 더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다는 분업론이 비교우위론이 주목하는 국제무역의 요체인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 산업의 특화라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렇다면, A국의 경우, 값싼 B국의 면사 제품이 수입되어 시장을 점령한다면 그동안 면사를 생산해서 밥벌이를 하던 A국의 국민들은 이제 어떻게 생계를 꾸려 나가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결국 A국이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어 해결하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한미 FTA 추진 상황을 지켜보면 여전히 논의는 FTA 체결 결사 반대 혹은 FTA 체결 결사 추진의 두 가지 논의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FTA가 타결된다면 한국으로서는 수혜산업들의 경쟁력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길러 나갈 것인지, 그리고 피해를 보게 될 산업 종사자들에게 어떤 대안을 제시해 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데 FTA 추진 세력들은 마치 FTA가 체결되면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FTA 반대 세력들은 FTA를 막아야 한국경제의 해외 예속화를 막고 부의 양극화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FTA 체결이 되지 않더라도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
즉, 한국은 한미 FTA가 체결되든 체결되지 않든 상관없이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고 소위 "경쟁력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경제의 경쟁력 강화를 어떤 방법으로 추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복안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 현재 한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이다. 게다가, 한미 FTA가 가져다 줄 비교우위의 효과는 한국에서는 당연히 양극화의 심화로 나타날 것이 명약관화한데 이런 정책을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자라고 부르는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 상당한 아이러니이다. 진정 노무현 정부가 좌파 그리고 신자유주의자라면 신자유주의자의 관점에서 FTA를 체결하고 좌파의 관점에서 FTA가 초래할 양극화의 심화 충격을 완화시킬 정책을 지금쯤 사회적 의제로 제시했어야 한다. 그러나 왜 노무현 정부는 FTA 체결에만 전력을 집중하고 FTA 이후의 양극화 심화에서 기인할 후폭풍을 막을 방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좌파 신자유주의자에서 좌파라는 단어는 도데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인가?
개인적으로도 글로벌 경제의 커다란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 경제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한미 FTA는 당연히 체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FTA로 기대되는 경제 성장은 국내에서 철저한 준비가 병행되었을 때만 실현 가능한 것이며 준비되지 않은 채로 체결되는 FTA는 그 부작용만 심각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한미 FTA가 체결되건 아니건 상관없이 한국 경제는 경쟁력 체질 개선이라는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신문이나 기타 매체를 통해 접하는 한국 사회 여론은 안타깝게도 이 부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지금이라도 한국 사회는 한미 FTA 체결 이후의 한국경제의 경쟁력 강화 방안을 중점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우루과이 라운드라는 단어는 요즘도 신문지상에서 낯설지 않게 접할 수 있지만 실상 우루과이 라운드와 농업시장 개방의 문제가 처음 떠오른 것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던 1990년대 초반이며 농업시장 개방의 문제는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개방 불가/당위의 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국내 농업과 농산물의 경쟁력 확보에는 과연 어떠한 노력이 투입되었던가? 우루과이 라운드 식의 시간 낭비는 한번이면 족하다.
‘이제 금기를 깨고 사회주의라는 말을 쓸 때가 됐다…평등과 민주주의, 시장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을 사회주의 말고 뭐라 부를 것인가.’우리나라에서 나온 양심선언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이후’라는 책을 낸 미국 웨인주립대 로널드 애론슨 교수가 진보적 잡지 ‘네이션’에 쓴 글이다. 개인의 자유보다 사회적 책임이 중요하다는 건 여기서도 많이 듣는 소리다.
마침 노무현 대통령이 색깔론의 오랜 금기를 깨고 자신의 노선을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규정했다. 진작 밝히지 않은 게 아쉽지만 우리나라엔 사상의 자유가 있다. 좌파면 어떻고 우파면 또 어떤가. 애론슨 교수의 글대로 사회주의라고 한들 별로 놀랍지도 않을 것 같다. 시장(市場)은 부와 권력을 공평하게 배분하지 못하므로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이념을 유럽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요즘 남미에서는 참여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지난달 열린 한 세미나에서 이주선 한국경제연 구원 선임연구원은 “참여정부의 규제개혁이 양극화 해소, 사회정의 실현, 분배적 평등 등 이데올로기적 가치판단에 입각해 개인 및 기업이 동반 성장하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쉽게 말해 세계와 역행한 사회주의적 개혁이 안 먹혔다는 얘기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는 것도 이제까지의 정책이 실패한 때문이라고 본다. 일각에선 좌파 신자유주의가 말이 되느냐고 하는데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은 ‘더 높은 수준의 개방과 그에 따른 양극화의 해소를 동시에 추구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FTA로 경쟁력을 키우고, 여기서 나온 ‘이익을 독점하지 말고 보상해 전 국민이 이득을 보는’(2월 16일 노 대통령) 체제를 꾀하는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같은 사회주의적 정책으로는 FTA보다 더 큰 것을 해도 경쟁력은 커지기 힘들다.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통해 미국과의 교역과 미국인 투자가 폭증했는데도 더는 경쟁력이 없어 고전하는 멕시코가 그 예다. 강성노조에 꼼짝 못하는 노동시장, 에너지까지 독점한 정부 주도의 규제위주 정책, 우수한 인재를 못 기르는 교육 탓이 크다. 우리 사정과 기분 나쁠 만큼 비슷하다.
노 대통령이 진정 FTA로 효과를 보려면 ‘충격요법’을 통해 일거에 경쟁력을 높일 게 아니다. 이제라도 국내시장을 자유롭게 풀어 줘 미국과 동등하게 맞설 능력을 키우도록 해야 상식에 맞는다. 재계에서도 더 나빠졌다는 비정규직법을 만들고, 출자총액제한제와 서비스업 진입 제한 등 규제를 고집하고, 대학까지 짓눌러 인재양성을 방해하면서 덜렁 FTA만 체결하는 건 무책임하거나 무서운 일이다. 국내 산업을 벌주려는 의도인가, 아니면 시장간섭을 계속할 작정인가. 혹시 FTA가 안 될 수도 있으니 괜히 시장 먼저 놔줄 수 없다는 정치적 계산은 없는가.
멕시코는 건전한 재정 통화정책, 민영화와 규제 철폐 등의 신자유주의 개혁 없이 개방만 했다. 좌파의 발목잡기로 경쟁력을 못 키운 채 싼 임금으로 먹고살다가 더 싼 중국과 인도로 일자리를 뺏기고 있다. 그리고는 이제 와서 신자유주의가, NAFTA가 잘못됐다며 다음 정권을 좌파 대통령으로 갈아 버릴 태세다.
스스로 신자유주의자라는 노 대통령이 진짜 신자유주의 개혁은 않고 FTA만 체결한다면, 다음 정권을 어느 쪽이 잡든 일자리만 뺏기다 멕시코처럼 다시 좌파정권이 집권할 공산이 크다. FTA 협상 과정에서 반미감정이 폭발해 좌파 재집권의 길을 열 수도 있다. FTA 체결이 되든 안 되든 좌파엔 꽃놀이패인 셈이다. 홍보만 요란한 FTA가 정치쇼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한미 FTA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가 시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시대착오적 정책을 버리면 설령 FTA가 안 되더라도 우리 경쟁력은 펄펄 날 수 있다. 정부가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른다면 정부부터 외국에 개방해야 살판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